이명주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갔습니다.
<작가노트>
자유..재미있게..
작업실에서는 천과 가위, 바늘과 실을 가지고 노는 듯이 놀았다.
이 게임은 추억의 시간 여행입니다. 과거로 돌아가십시오. 시간은 흐른다.
지금 있는 것은 낡은 것이 된다.. 돌고 도는 이치처럼.
이렇게 놀다 문득 머릿속에 그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가위로 잘랐다. 우리의 일상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들입니다. 꽃..수양버들. 곤충.. 새.. 물고기.. 애벌레.. 개구리.. 그릇.. 책.. 함지박.. 항아리.. 탁자.. 등등
Deja vu, deja vu... 익숙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삶의 흔적들을 붙이고 붙이고, 삶의 소소함과 소박함을 묻고, 그것들을 모아 퍼즐을 맞추듯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색상의 조화. 구성의 완성도. 이런 것들은 나와 거리가 멀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원단의 패턴과 색상은 주변의 다른 원단들과도 익숙해지고.. 차별도 안하고..그뿐..
나는 그저 그것과 함께 살고 옳고 그름은 없으며 희망을 한 땀 한 땀 옮깁니다. 나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 나는 행복하다. . 그게 다야. 행복은 본질적으로 작습니다.
봉제된 형태를 넘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바늘은 붓이 되고, 실과 바늘땀은 색과 선이 됩니다.
일하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어요. 때때로 나는 생각을 넘어서는 공허한 침묵을 느낀다. 그걸 무의식이라고 하나요?
그릇 옆에 꽃이 피고, 책 주위를 날아다니는 곤충과 같다. 바람은 너를 쏘기 위해 분다, 꽃은 날아 흩어진다. 그래서 작품 제목이 '쓸데없는 것'이다.
내 작품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 할머니가 소중히 여기는 것, 우리 어머니의 소중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그들을 부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리움과 따스함, 작품 속 어딘가에 숨겨진 쓸데없는 것들의 숨겨진 재미와 기쁨을 느끼길 바란다.
그건 진실이야. .그게 다야. .
물은 이리저리 흐르지만 머무를 곳이 없다.
벚꽃의 달콤한 유혹...사슴의 가벼운 입맞춤, 끈질기지 않은 삶 속
나는 단지 흐르고 싶다. 매일매일 바느질해요 그냥 재봉인이라 불릴만해요
편견 없는 삶의 길을 걷고 싶다..그뿐이다..
결국 제 작품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시길 바라며 행복은 단순합니다.
2022년 4월 어느 봄날.. 이명주..
아래는 이명주 작가님과 같은 한국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국화>
한국화는 한국의 전통적인 기법과 형식에 따라 그린 그림의 총칭입니다. 흔히 동양화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 일본 우키요에와 중국화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다소 모호하다. 사실 아주 넓은 의미의 한국화는 고분벽화까지도 한국화로 그릴 수 있다.
<고대>
고대에도 한반도에는 항상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고분 벽에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재 고구려 벽화고분은 100기 정도 남아 있으며 고구려 사회와 귀족과 서민의 삶, 사후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천마와 신라 행진 등의 그림이 말을 타고 남겨졌다. 고분벽화에 나타난 수주의 이야기와 고구려 여인상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 회화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화가나 그림에 대한 이론은 많지 않다.
<중세>
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많은 불교 유물이 남겨졌습니다. 통일신라 국보 제196호가 있다. 고려시대 유물이 많다. 귀족의 개인 불당에 안치된 이 불상은 주로 당시 유행하던 관세음보살상을 대표한다. 조선시대의 수묵화와 달리 고려시대의 불화는 금니와 각종 안료를 사용한 상당히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근대 한국화의 특징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이때도 여전히 채색화를 그렸지만 유교적 질서를 형상화한 문인화와 수묵화가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특히 Dong Dongchang의 Nanzong 이론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영향은 문인화만이 아니었다. 김홍도는 북과 남을 오가며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조선말에 돌아와 장승엽처럼 중국 초상화의 방향을 따르게 된다.
민화와 같은 서민화나 조선후기 불화도 민화의 혼성양식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한국화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로 남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백색분을 많이 사용한 치장벽토화가 유행한다. 한편, 이 시기는 가오시동(高西東) 등 화가들이 일본으로 서양화를 배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주한 일본 총독부는 독립을 막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는 표현을 억제하고 향토색을 강조한 그림을 장려했습니다. 이 시기에 안중식, 조석진 등의 화가들이 유명해졌고,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이상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용우는 유명해졌다. 또한 매우 활동적입니다. 이 가운데 김기창·김은호·노수현·이상범은 신문에 삽화를 그려 징용을 독려하는 등 친일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1950년대>
한국화라는 용어는 해방 이후 미술계에 등장했다. 해방 후 한국 미술계는 세 가지 큰 도전에 직면했다. 첫째는 일제강점기 일본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한국문화를 발굴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문화를 국민통합의 수단이나 이데올로기 전파의 수단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문화가 한국에서만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 당시 미술계의 큰 문제가 한국 동양 미술계에 등장했는데, 이른바 '일본의 미의식'이다. 쉽게 말해 1950년대 동양화단은 한국화단의 특징을 살리면서 동양화에서 일본화단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자연스럽게 '한국 동양화'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었다.
대표적인 기사 중 하나가 1954년 8월 5일자 칭강 김영기가 『서울신문』에 실은 기사이다. 『근대동양화의 진수: 한국국화의 시급한 건립』에서 그는 '동양화'라는 명칭 자체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임을 밝히고 '한국화'라는 용어를 정식 명칭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문화를 만드는 것. 이후 그는 '동신문'의 "회화의 이름에 관하여: 한국화의 시급한 양식"에 대해 답했고, 김기창의 '경향신문' 기고에 "산수화가 아닌 동양화"라고 답했다. "동양화가 아닌 한국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화의 용어를 정립했다. 잠자는 청강 김영기는 한국화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70년대 그의 한국화론은 동양화단의 젊은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영기의 입장과 달리 당시 미술평론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는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의 냉담함보다는 동양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적 인식에 대한 반응이다.
예를 들어 윤희순은 1946년 『한국미술사연구』에서 서양화에 비해 동양화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일본 동양화와 한국 동양화의 유사성을 식민주의의 잔재에 기인한다고 인식하였다. 또한 이는 일제강점기 이후 미술비평의 경향, 이른바 '미술근대화'에 기인하기도 한다. 동양화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과 더불어 특정 작가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 무렵 기요타 이상범의 그림은 일본 난가의 안개와 유사한 표현 방식으로 비판을 받았다. 나는 이념적 문제와 겹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50년 전쟁과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은 한국의 동양화단이 독자적인 예술 이론에 기초한 회화상을 제정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1970년대>
1970년대의 맥락에서 정치적 변화는 한국 동양미술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문화를 문화정책으로 지원한다. 이는 해방 이후 고미술에 대한 관심에 비해 근대 동양화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거의 전무했던 현실과 대비된다. 이 경우 동양화협회 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쟁점은 국전 동양미술부의 구상과 비구상 영역의 구분이다. 특히 이 문제는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동양화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대결은 대체로 끈질기고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기존의 국전과 국전 제도의 변화를 통해 동양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대결이다. 묵림회 회원 서세옥은 젊은 작가의 대표주자다. 쉬시위는 동양화의 추상화를 통해 산수화가 지배하던 동양화단을 변화시키고 한국 고유의 '한국화'를 홍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1970년대 초반 한국화가 전체적으로 동양화의 개념을 언급하기보다는 새롭거나 전위적인 동양화라는 의미에서 기존의 동양화를 대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1년 이경성은 『조선미술잡지』 『미술개요 - 한국화의 가능성』에 기고했는데, 이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화를 비판하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같은 해 박용석은 『신동아』, 『한국화 존중-한국화의 기원과 개념』을 기고하며 국전과 상충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국화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한국화'라는 용어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때 한국화 자체가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부 그림에서 가끔 언급됩니다. 조선시대의 그림을 한국화라고 하고, 정변관식의 그림을 한국화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긴 해도 당시 한국화라는 용어는 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상충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1970년대 한국화 논의에서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이들 용어의 혼용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이후 유리의 대량생산과 서양식 액자의 인기로 한국의 액자를 집에 걸어두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이러한 한국식 액자와 나전칠기 장롱이 가정을 상징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지금도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1980년대>
1979년 말 한국화라는 용어가 동양화단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한국화'라는 용어는 특정 시대의 특정 화가나 그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동양화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1983년에는 한국화라는 용어의 용법이 바뀌었다. 우선 교육적인 면에서 1981년 12월 교과과정을 개편하고, 1983년 동양화의 현재 명칭을 한국화로 변경하였다. 미술계에서는 1982년 한국미술전람회에서 동양화를 한국화의 범주로 등재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3]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동양화와 관련된 각종 전시, 회고전, 기획전 등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1980년대 한국화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동양화를 통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러한 변화의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와 연계하여 『한국 현대미술사: 동양화』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1984년에 이 책이 수정 보완되어 재간행되었을 때 더 이상 "동양화"가 아니라 "근대한국화"로 제목이 바뀌었다. 불과 7년여 만에 용어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1985년 "Art World" 11월호에 실린 Li Shijiu의 기고문은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한국화의 현주소를 진단하면서 "한국화라는 말이 나온 지 몇 년이 되지 않았다"며 한국화 논의의 출발점은 김종강 선생의 공헌과 활동이라고 지적했다. . 이러한 견해는 한화라는 용어의 어원을 논할 때 정통으로 간주되어 최근까지 일부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요컨대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김영기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 문화청산 문제와 맞물려 제기되며, 한국이 당면한 3대 문제와도 연결된다. 1950년대 한국 미술계.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까지 제한적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동양화단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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